Choi Byung-So: Untitled
우손갤러리 서울은 2025년 4월 24일 부터 6월 21일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작업방식을 확립해온 작가 최병소의 개인전 《무제(Untitled)》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반세기에 걸쳐 이어진 작가의 조형 언어를 집약적으로 소개하는 자리로 신문, 잡지, 인쇄물 등 일상의 매체를 기반으로 한 ‘긋기’ 행위 중심의 작업들로 구성된다.
최병소(1943-)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와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1970년대 후반 대구 현대미술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회화의 조형성과 의미 구조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지속해 왔고, 신문, 잡지, 인쇄물 등 대중매체를 활용한 ‘지우기와 긋기’행위를 통해 작업의 방법론을 정립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평면 작업을 넘어서, 언어 구조와 권위의 해체, 이미지 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개입으로 작동한다.
그는 ‘지우고, 긋고, 축적하는’ 반복 행위를 통해 이미지의 구조와 언어의 권위를 해체하며, 표면 위에 ‘무(無)’의 평면을 구축해 왔다. 그의 작업은 회화, 드로잉, 설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보와 의미가 제거된 자리에 시각적 긴장과 형식적 밀도를 구축한다. 이는 단순한 표현 행위를 넘어, 표현을 벗어난 행위 자체로서의 예술을 제시하며, 동시대 미술에서 보기 드문 독자성을 확보해 왔다.
작가는 선을 긋고 지우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매체의 본래 정보 구조를 제거함으로써, 시각적 질서 자체를 새롭게 재편한다. 이는 전통적인 회화 재료와 기법을 회피하고, 일상 매체를 통해 제도화된 미술의 형식성과 제약을 우회하는 방법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가 말하길, “나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지우는 것은 생각을 비우고 생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최병소의 대표 연작인 '무제(Untitled)' 시리즈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드로잉, 회화 및 콜라주, 사진 작업, 그리고 6미터 길이의 대형 설치 작업, 작가의 제작 과정을 담은 비디오 영상 등 3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해당 작업은 신문 지표면 을 수없이 긋고 덮어 마치 숯이나 금속을 연상시키는 비정형적 표면을 생성하며, 매체의 물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을 통해 시각적 밀도와 재료 흔적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최병소의 작업은 1970년대 한국 단색화 경향과 형식적 유사성을 보이나, 그 접근 방식과 개념적 지향점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그는 단색의 회화적 표면을 구축하는 대신, 삭제와 중첩이라는 물리적 행위를 통해 정보 매체와 언어 구조에 대한 실천적 비판을 수행해 왔다. 실제로 그는 1970~80년대 주요 단색화 전시(《한국현대미술의 단면》(1977), 《에꼴 드 서울》(1976-1979), 《한국의 단색화》(2012))에 참여하며, 단색화 작가들과 활동 영역을 공유했지만, 실험미술에 가까운
초기 작업들—예컨대 철심을 바닥에 배열하거나, 썩는 고등어를 전시 공간에 설치, 사진 위에 텍스트를 병치하는 작업 등—의 실험적 작업은 그가 일찍이 추상회화를 넘어 개념 기반의 조형 탐구를 수행해왔음을 잘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의미를 제거하는 행위’가 최병소 작업의 개념적 기반으로 작용하며, 조형 언어의 구조를 전환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병소의 작업에서 긋기와 지우기의 반복은 단순한 신체적 수행이 아니라, 생산된 기존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매체 내부의 정보 구조를 해체하며, 새로운 시각 질서를 표면 위에 구성하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는 표상 중심의 시각예술 전통을 벗어나, 비표상적 구조를 통해 회화의 개념적 확장을 시도하는 현대 미술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최병소는 지난 수십 년간 일관된 작업 방식을 통해 회화의 본질과 그것을 둘러싼 제도적·매체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탐구해 왔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양식적 차별성을 넘어, 현대미술 개념과 실천이 결합된 독립적 경향을 형성해 온 사례로 평가된다. 이번 전시는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해 온 비표상적 조형 언어의 작업 과정을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정리하는 동시에, 시각예술에서 ‘제거’와 ‘반복’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하나의 조형 원리로 작용하며 새로운 시각적 질서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