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Around: 김채린, 지선경, 정진, 양하
미국 추상미술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자신의 회화 작품을 설명하면서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의 전부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말을 했다. 이는 회화가 캔버스 표면에 제시된 형태와 색채의 물리적 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창작자를 완전한 창조자로 설명하는 그는 미술에 형식적인 것 외에 어떤 것도 없음을 말하며, 감상자의 해석을 배제했다. 역사적으로 미술에는 많은 이론과 비평이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관람자는 미술에서의 큰 고려의 대상은 아니었다.
현대 미술 비평가 니콜라 부리요(Nicola Burio)는 그의 저서 ‘관계의 미학(1988)’ 에서 예술을 ‘만남의 상태’ 라고 정의한다. 그는 90년대 이후의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관계미술(Relational Art)을 제시하며, 작품은 하나의 완성된 미적인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의미를 생산하는 상징 체계가 되며, 전시장은 상호 교류의 장이 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관객참여형 미술이 모든 미술에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더라도, 관람자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미술을 보는 새로운 관점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
지금의 미술은, 부리오가 제시한 것처럼, 여러가지의 기호, 정보가 교류할 수 있는 하나의 장,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미술을 창작하는 창작자의 태도 또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제목 《All Around 올 어라운드》는 미술이 만들어내는 장(場)을 의미한다. 이 장(場)에서의 ‘교류’는 작품이 발산하는 기호로서의 의미 외에도 전시장이라는 공간, 시간 때로는 관람자의 행위와 감정, 상황 등 전시장 내에 존재하는 많은 개별적인 정보의 교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많은 정보들이 연결되어 엮이며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전의 미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적극적인 지적 참여를 통해 동시대의 미술은 경험되고,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
본 전시에 참여한 양하, 김채린, 지선경, 정진, 네 명의 작가들은 다양한 형태의 만남으로 전시장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촉각적인 행위를 통해 조각의 경험을 생성하고,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조형적으로 풀어내기도 하며, 현대인의 불안과 욕망이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구성한다. 재료적인 측면에서도 작가들의 새로운 태도를 관찰할 수 있는 데 이전 작업의 잔재를 이용하거나, 부서지고 형태가 변형된 작업을 새로운 작업의 재료로 활용하며, 새로운 맥락으로 작품을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양하는 폭발이라는 폭력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적으로 인지하고, 폭발의 이미지를 구름과 같은 형태로 파스텔 컬러를 이용해 풀어내고 있다. <폭발을 위한 드로잉>에서 흘러내리는 표면의 표현과 부드러운 형태와 컬러는 폭발이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파편화된 날카롭고 뾰쪽한 상황과는 상반되지만, 작가는 모순적인 이미지를 통해 폭발이라는 어쩌면 잔인하고 폭력적인 상황을 통제하기 보다는 이를 무력화(無力化) 시킨다. 또한 양하의 폭발은 물리적인 상황이기도 하면서 감정의 폭발로도 읽혀진다. <울라고 만든 장면인데 울어야지>에서는 감정의 폭발과 물리적 폭발이 동가의 의미를 갖고, 자조적인 표현으로 상기된 감정을 중화시킨다. 미디어로 접하는 전쟁, 폭력은 누군가에게는 현실이고 다른이에게는 지나가는 한 토막의 뉴스이다. 재난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갈 때, 우리는 냉정할 수 있을까?
김채린의 <그로부터 비롯된>시리즈는 주변의 물건에서 출발한 조형적인 탐구로, 색과 형태의 변주를 통해 일상 생활의 사물을 재치있게 변화시킨다. 작가의 작업은 인체를 매개로 하며, 조각의 경험을 제공하는 2007년부터 시작해온 <팔베개>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촉각으로 경험하는 조각이라는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는 관람자의 접촉의 경험을 통해 관계 구축하고 의미를 생성한다. 촉각을 통해 작품의 질감과 부피를 느껴보고, 시각적인 무게감과 견고함에 반대되는 경험을 통해 시각적 인식의 오류를 정정하기도 한다. <세이브 미>시리즈는 작업의 부산물과 버려진 것들, 때로는 망가져 형태가 변형된 기존의 작업에 새롭게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버려진 것들과 작업의 생명주기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보여준다.
지선경은 <Cromatopia 크로마토피아>(2023-2024)에서 자신이 지내온 도시에서 작업 후 남은 종이 조각을 활용해 색과 형태를 배열함으로써 가본적 없는 새로운 대륙을 만들어낸다. 전통적인 지도를 모티브로 하는 이 작품은 리듬감 있는 종이 드로잉의 배열로 움직임을 드러내며, 미지의 공간을 이동하는 이동의 시간을 투사한다. 작가는 심리적 정서적인 감정이나 빛과 같은 자연 현상이 만들어내는 또는 특정 공간 에서 감지된 비시각적인 감각을 조형적으로 표현한다. 휘고 구부러지며 유연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종이라는 매체를 사용하며, 드로잉이라는 이름으로 공간 안에 시적인 운율을 만들어낸다.
정진 작가는 설화, 신화 그리고 디즈니 만화와 같은 익숙한 이야기 속에 드러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욕망과 불안을 다룬다. 작가는 다양한 이야기 속 인간의 욕망과 불안을 읽어내고 이를 여러 층위의 화면으로 구성한다. 익숙한 이미지와 상징들로 구성된 화면은 서술 구조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만화의 효과선, 말풍선과 같은 시각적 도구선을 이용해 화면내의 서술 구조를 방해한다. <물위를 걷는 다리>시리즈는 거친 바다의 울렁임과 명화와 만화의 이미지를 조합해, 모험을 떠나는 이들에게 닥칠 앞으로의 고난과 역경을 암시하는 듯 하다. 이렇듯 다양한 이미지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뉘앙스는 관람자에게 힌트를 제공할 뿐, 각자가 적극적인 읽기를 통해 개별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본 전시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관람자의 적극적인 감상행위를 통해 작품의 의미가 생성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자 했다. 지금의 미술은 더 이상 지시적이지 않고, 닫힌 결말이 아닌, 열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관람객 개개인이 전시장의 사방(all around) 에서 발산되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해 각자만의 상(象)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감상의 방법을 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