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미: Settlement

2 December 2021 - 4 Februar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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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허찬미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상당수가 인간이나 동물, 식물 등과 같이 구체적 조형적 특징을 가진 모티브가 건축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가구와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와 같은 기하학적 형태의 모티브와 함께 화면 위에서 간결하고 견고하게 균형을 이루며 안정적인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티브의 무거운 물성, 물리적 실체의 강한 존재는 그들의 시각적 배치 상태나 환경 조건에 대한 어떠한 서술적 묘사 없이 일종의 구체성과 객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모티브(사물과 사고)의 구체성은 빛의 상황 즉, 햇빛 또는 어둠과 같은 일상의 빛뿐만 아니라, 실제 환경에서의 실제 위치를 강조하는 그림자 효과에 의해 더욱 부각된다. 반면, 사물과 그 주변의 물리적 구체성을 강하게 강조함으로써 사물의 존재는 작품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매개체나 일화적 맥락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 속에 숨겨진 결정적인 측면에 접근하려는 작가의 신중한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작가의 채색 방식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섬세하고 미묘한 회색 톤의 처리 방식은 다소 버려지고, 잊혀지고,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정지된 사물들의 정적이고 고요한 세계에 대한 허찬미의 비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모티브의 단순함과 겉보기에 하찮음, 움직이지 않는 수동성 그리고 그들의 왠지 모를 쓸쓸함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동떨어져 나온 사물이 집합체와 연결되지 않는 측은한 시적 현상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다.

허찬미의 작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녀의 회화 속에는 마치 꿈속의 정지된 한 장면처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미세한 사건들의 움직임이 섬세하게 시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도블록 틈 사이에 자리 잡은 풀, 공사장 철근 위에 앉은 까치, 콘크리트 도로의 맨홀 뚜껑 등 도시 생활의 작고 진부하고 중요하지 않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녀의 그림 속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도 그렇다고 소외되거나 고립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대표하는 기준이나 개념의 틀에 부합하지 않은 익명의 존재들이 자리 잡는 집약된 시적詩的 장소이자 무대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시적으로 적절하게 정리되어 획득한 익명의 객관성을 통해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되는 반면, 개인적인 존재로서 그들이 얼마나 취약하고 덧없는 존재인지 거듭 환기시키는 것이다. 허찬미의 작품 세계는 시간을 초월한 단조로운 정지 상태가 특징인 반면, 그녀가 정작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겉보기에 고요하고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안정된 표면 위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게 여겨지는 세상 속 단역들의 미세한 행위와 에너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취약하고 덧없는 제한된 삶에 대한 작은 뉘앙스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진부하고 사소한 디테일들은 이 고요한 미세서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아 견고하고 진실하며 없어서는 안 될 실체의 숨겨진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91년 부산 출생의 허찬미는 지난 10년 동안 우손갤러리에서 소개해 온 아티스트 중 최연소 작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제 막 30살을 넘긴 젊은 나이지만, 그녀가 작품을 통해 동시대를 바라보고 대처하는 자세는 그 어떤 거장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는 진지함과 진실함이 담겨있다. 늘 새로운 것에 주목하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새로움과 진정하지 못한 새로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세상의 주목을 끌거나 화려한 겉모습으로 새로움을 연출하려는 우리는 지금 허찬미에게 주목해야한다.

Text © 2021년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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