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物 무물: Choi Sangchul

10 October - 16 Nov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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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최상철 작가의 전시 《무물(無物)》은 예술의 시원을 찾아 고군분투해온 50여 년간의 시간의 궤적을 대구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시이다. 그가 한국 화단에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였다. 그 후 2024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17회의 개인전과 110여 회의 단체전을 해 오면서 굳건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 그 최초의 순간을 향해, 끊임없이 새로운 도구를 찾고 실험하며 그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화업을 개척해왔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2004년 이후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명명해 오고 있는 표제인 ‘무물(無物)’이다. 무물이라는 단어는 작가가 스스로의 작업을 소개하는 가장 완전한 설명이기도 하다. 무물이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혼돈의 상태”로 “형태가 나타나기 전,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무(無)’라는 것은 ‘단순히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는 ‘어떤 것’으로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는 혼돈 그 자체다. 그것은 ‘온갖 사물들의 시작이며, 근원’이다. 다시 말해 무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충만한 순간을 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무물은 ‘어떤 것’이 탄생 이전의 상태로, ‘폭발하기 직전의 모든 가능성이 응축된 순간’인 셈이다. 작가는 ‘무물’이란 말에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의 모습이자, 예술의 시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았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현실을 묘사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다시 말해 ‘그럴 듯하게, 잘 그려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순간’, 그 자유로움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무물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노자(老子)의 글을 인용하며 ‘무위(無爲)’의 상태를 지향하는지 묻는 거창한 우문(愚問)에 그는 소박하면서도 단호하게 응대한다. “그저 매일 마음을 온전히 비워내고, 그렇게 빈 공간과 마주하기 위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게 아니오”라며, 이렇게 노력해서 만나고자 하는 ‘그 세계’는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자연이라고 말한다. 작가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충만하고 그 자체로 편안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 자연에는 온전한 질서의 세계 그 자체가 펼쳐진다. 수많은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각축장처럼 보이는 자연 속에는, 그저 그렇게 생겨난 것들이 조화롭게 각자의 존재답게 살아간다. 최상철 작가는 바로 그러한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그 규칙이 자신의 그림에서 드러나길 바란다. 그것을 위해 시작해야 하는 첫 단추가 바로 자신의 흔적을 최대한 지워 비워내는 것이었을 뿐이다.

 

흰 캔버스 위에서 1,000번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궤적들 앞에 마주 선 작가는 더 잘 그리고 싶고, 더 많은 의미와 가치를 담아내고 싶은 열망, ‘일반적인 의미의 성공한 예술가’들의 욕심, 너무나 당연하다 싶은 예술을 향한 욕망을 덜고, 또 덜어낸다. 심지어 그는 이런 마음을 모두 덜어내고자 하는 행위조차도 욕심이 아닌가 자문한다. 작가는 지금도 자신의 의지, 의도, 취향을 비롯한 사소한 인위(人爲)조차도 자신의 그림에서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새로운 시도들을 거듭해 왔다. 그렇게 수십년의 시간 동안 그림에서 자신의 의도가 들어갈 수 있는 지점들을 하나씩 소거했다. 작품을 시작하기 위해 첫 번째 점을 찍을 때도, 점을 이어 선을 그을 때도, 선을 더 그어나갈 방향을 선택해야 할 때도, 심지어 작품을 마무리하는 순간마저도 작가는 정해진 소거의 규칙에 충실한 행위자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최상철 작가의 작업에서 붓은 소거되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최적화된 붓이라는 도구 대신에, 그는 그리는 이의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워서 잘 그려낼 수 없는 새로운 도구들을 고안했다. 첫 번째로 사용한 도구는 테이프였다. 손톱을 이용해서 색을 칠한 종이에 한쪽 면만 눌러 붙인 테이프는 떼어내는 힘에 의해 무작위적으로 종이를 뜯어낸다. 색이 칠해지지 못해 작가가 의도치 않은 빈틈을 만들어주는 나무틀, 흥건한 물감을 이리저리 밀어내어 생기는 얼룩을 남겼던 스퀴지부터 캔버스에 세게 내리쳐서 비산하는 흔적들을 만들어낸 쪼개진 대나무 막대, 물감을 묻힌 실, 철사 그리고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제멋대로 생긴 검정 자갈돌 등이 작가가 도전적으로 사용한 실험적 도구들이다.

 

이러한 도구뿐 아니라 색 또한 최상철 작가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색 역시 다른 의미의 의도가 담긴 회화적 도구이다. 작가는 이렇게 회화가 가진 모든 기교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어떠한 장치들도 적극적으로 제거했다. 그렇게 그의 작품에는 검은 흔적들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가 향하는 ‘비워진 공간’으로서의 작품은 비록 무음이지만, 형태로 드러나기 위한 폭발 직전의 궤적들이 가득차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웅장하면서도 강한 힘을 발산한다. 그것은 화면 밖으로 쏟아지는 듯한 에너지이기도 하며, 화면 전반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더 넓게 확장되어가는 찰나(刹那)의 응축된 시간이기도 하다. <무물>은 마치 시공간이 멈춘 것처럼,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는 어째서 <무물> 앞에서 숨을 멈추고 압도당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평상시에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근원적인 힘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 힘이 바로 온갖 사물, 더 나아가 이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있음(有’) 그 자체이다. 무(無)는 유(有)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예술작품은 가능성의 장소로, 언어화될 수 없는 ‘무’, 즉 아직 의미를 갖기 이전의 있음이 그 자체로 드러나는 곳이다. 예술은 근원적인 것-있음 그 자체-와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상철 작가는 회화야말로 ‘일체의 꾸밈이 없는 진정한 세계(없음으로 있는 세계)’ 그 자체를 드러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회화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거기에서 회화는 시작되었다. 최상철 작가가 마주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회화의 ‘근원적인 시원’이다. 그래서 그는 완숙된 기교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에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매 순간 다르게 드러나는 무한한 가능성과 마주하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꾸미지 않는 진정한 세계인 자연, 다시 말해 ‘있음 그 자체’가 자신의 캔버스 위에 온전히 내려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업에 임하는 그의 모든 순간들은 진정한 세계, ‘진실된 나’와 마주하기 위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시간’이었다. 최상철 작가가 마주한 영원한 찰나의 시간을 이번 전시 《무물》을 통해 경험하길 기대한다.